[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송곳니’
수정 2011-12-16 00:26
입력 2011-12-16 00:00
독재를 향한 가슴 서늘한 충고
한 작가의 영화를 언급하면서 그가 속한 국가의 영화를 운운하는 건 옳지 않다. 작가는 국가를 대표하는 운동선수가 아니며, 그의 개성과 주제가 반영된 영화는 국가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심 바깥에 있던 나라에서 몇 감독이 동시에 출현해 주목받을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송곳니’는 교외의 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우화 같은 이야기다.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아내와 세 자녀를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시킨다. 안팎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아버지를 통해 가족은 필요한 물품을 얻는다.
아내가 남편의 노선에 은밀하게 동조하는 가운데, 한 번도 담장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아들과 두 딸은 주어진 현실에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데려온 공장 직원과 몸을 섞으며 욕망을 해소하고, 자매는 아버지가 가져다준 소소한 물건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소녀처럼 경쟁한다.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아버지는 송곳니가 빠져야만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큰딸은 궁금하다. 흔들리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는 송곳니는 언제쯤 빠지는 걸까.
란티모스는 선배들이 오랜 주제로 삼아온 ‘그리스 독재의 역사’를 다시 화두로 꺼내든다. 그는 ‘송곳니’가 억압적 체제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달라진 건 영화의 스타일이다. 가브라스와 앙겔로풀로스의 비판이 리얼리즘에 바탕을 뒀다면, 란티모스의 블랙코미디는 풍자와 상징으로 독재의 비극을 은유한다.
‘송곳니’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하는 작품이다. 어리석은 대사를 읊고 유치한 게임에 골몰하는 인물들은, 무대 위에 묶인 채 끊임없이 부조리극을 펼쳐야 하는 인형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혹자는 독재에 대한 빤한 은유만 넘쳐나는 지루한 작품이라고 불평하기도 한다. 충격파로 배치된 후반부의 사건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송곳니’를 보던 일부 젊은이들은 몇몇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독재의 시기를 경험한 자들은 ‘송곳니’를 보며 감히 웃을 수 없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들은 현실의 극적 표현임을 안다. ‘송곳니’는 독재자보다 통제당하는 존재들을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바다’를 ‘의자’라 불러도 믿고 지내던 각각의 인물들은 무지의 정점에서 동물로 변하고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조차 폭력적인 몸짓으로 반응한다. 일렬로 앉은 가족이 아버지 앞에서 개처럼 짖고, 아이들은 무감각한 얼굴로 망치와 가위를 휘두른다. 그들의 피와 멍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독재의 시간은 끝났다고 위안할 수 있을까.
독재자의 망령이 아직 주변을 맴도는 지금, 소통의 창구이면서 소통을 막는 미디어가 판치는 지금 ‘송곳니’는 가슴 서늘한 충고를 전한다. 1월 5일 개봉.
영화평론가
2011-12-16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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